
▲김태훈 영화예술학과 교수가 ‘필 로마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사진/홍보실DB)
필 로마노.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건축 사업가의 아들, 보유한 외제차 5대, 바람둥이이자 신념보다 돈이 우위에 있는 희대의 마초남..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에서 필 로마노 역할을 맡은 김태훈 영화예술학과 교수는 연극이 끝나는 날, 세련된 분장을 마친 뒤 셀카를 찍고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필 로마노, 이 멋진 놈을 이제 떠나보낸다!”라고.
김태훈 교수가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에서 필 로마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에쿠우스’ ‘고곤의 선물’에 이어 또 한 번 굵직한 역을 소화해냈다는 공연계의 평이다. 우리는 영원한 챔피언은 성공제일주의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20년 전 펜실베니아 주 챔피언 게임에서 우승했던 필모어 고등학교 농구부 멤버 4명이 시장, 사업가, 중학교 교장이 되어 만난다. 이들은 시장인 조지의 재선을 돕기 위해 머리를 맞대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서로를 이용해 이윤을 얻으려는 각자의 속내가 드러나게 된다. 불륜과 과거의 파국적인 비밀이 연이어 밝혀지면서 얽히고설킨 그들의 모습은 현대 사회의 타락한 인간성을 그려낸다.
이 작품은 미국의 극작가 제이슨 밀러의 대표작으로 1972년 초연됐으며, 뉴욕드라마비평가상,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았다. 국립극단의 2014년 기획주제인 ‘자기응시’를 다룬 두 번째 연극인만큼 미국과 다르지 않은 한국 사회의 권력, 성공제일주의, 물질만능을 꼬집고 있다.
그동안 에쿠우스의 ‘다이사트’나 고곤의 선물의 ‘담슨’처럼 인간 내면을 깊숙이 탐구하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던 김 교수는 외향적이고 거친 필 로마노를 연기하기 위해 표현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는 “필 로마노는 재력가에 바람둥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중요했다. 제스처나 걸음걸이, 화술까지 다이내믹함과 리듬감을 살리려고 많이 애를 썼다. 소품이나 헤어 의상까지 화려하게 꾸몄다”고 말했다.
농구부 시절 “지는 것은 죄악이다. 오직 이겨라!”라며 훈련 내내 윽박질렀던 코치의 말처럼 주인공 4명은 도덕이나 신념보다 오직 돈과 승리만을 위해 달린다. 역설적으로 이 모습은 관객들에게 ‘진정한 승리’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김 교수는 “작품의 인물들은 1등만이 최고라고 여긴다. 아직도 우리 사회 또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엔 1등만 살아가지 않는다. 진짜 승리란 남 위에 서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승리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융합해 새로운 창조를 이뤄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곤의 선물에서 광기의 극작가 ‘담슨’을 연기하고 있는 김태훈 교수 (사진/홍보실DB)
대학원장이자 교수 그리고 연극배우. 1인 3역을 해내며 그는 1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연극만 해도 4편의 작품을 하며 낮에는 필 로마노로, 밤에는 담슨으로 살기도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의 소회가 남달랐다. “작품 속에서 관객과 소통하고 제대로 표현하기까지 많은 고통이 있었다. 연습하고 고민하고 질타도 받고 좌절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왜 안될까?’ 생각하며 많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창조된 연기예술, 그 극한점에서 만나는 행복감을 올 한해 참 진하게 느꼈다.”
진한 행복감은 관객과 전문가들도 감동시켰다. 지난 12월 22일, 김 교수는 제 15회 ‘김동훈연극상’을 수상했다. 김동훈연극상은 그 해 가장 왕성한 연극 활동을 하며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연기를 펼친 배우에게 돌아가는 상이다. 김소희, 남명렬 등 연극계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역대 수상자들이다. 김 교수는 “수상 소식을 듣고 울컥했다. 힘들었던 40대를 털어버리고 50대를 만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연극을 미친 듯이 했다. 그 노력에 보상을 받았다는 느낌이다. 아내에게 이 상을 바치고 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취재 및 글|김지아 홍보기자(zia_7@naver.com)